三枝壽勝の上海通信

上海だより 9月


삼십 년을 되돌아 보면서

三枝壽勝 2003.08.23

내가 한국말을 배우기 시작한 지 30년이 지났다. 올해 3월 정년퇴직으로 대학교를 떠나게 됐다. 취직한 후 20년만이다. 연구자로서는 결코 길지 않은 기간이어서 특별히 감개라는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동안 내 나름대로 목표로 한 것이 없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생각하면 아쉬운 감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내가 한국말을 배우고 문학을 전공으로 한 동기에 그리 명백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당시의 상황이나 분위기에 휘말려서 우연히 그렇게 됐다고 말해야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때는 이미 한국과 일본 사이의 국교가 이루어지고 교류가 시작됐었지만 아직까지 두 나라 사이의 관계는 어딘가 원만하지 못해서 툭하면 마찰이 일어나곤 했었다. 그런 미묘한 관계의 배후에 있는 것에 대한 궁금증이 나로 하여금 한국문학을 전공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단순히 과거의 신민지시대에 대한 반성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일본사람이 과거의 역사를 외면하고 한국의 모든 것에 대해 마음대로 비평이나 해석을 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도 문제이지만, 과거의 역사에 대한 반성을 지나치게 내세우는 것도 문제가 있을 것이다. 과거 지향 사고방식이 바람직한 앞날을 열 수도 없겠지만, 자기 마음대로 침략도 하고 반성도 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도 역사의 주체는 일본사람밖에 없다는 셈이니, 또한 문제가 된다.

일본사람에게 있어서 한국문학은 외국문학이다. 외국문학을 접한다는 것은 거기서 무엇인가를 배우려고 한다는 행위를 말한다. 그것은 자기와 이질적인 문화권의 사고방식이나 습관을 이해하려고 하는 작업이며, 넓게 말하면 자기 반성의 일종일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한국문학이란 수수께끼 투성이의 대상이었다. 그 알 수 없는 수수께끼를 푸는 작업이란 도저히 혼자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많은 연구자에 의한 공동작업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나 이런 내 생각에 동의하는 일본사람 연구자는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 한국문학 연구란 나와는 목적이 완전히 다른 것 같았다. 성격이 고집스럽고 사교성 없는 나는 당연히 외톨박이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그 사정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내가 당초에 목적으로 한 작업은 실패한 것이다. 따라서 지금 아쉬움이 있다면 연구가 어중간한 상태로 끝났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런 나를 위해 나도 모르게 기념논문집이 기획되고 이번에 그 책의 출판기념회까지 열렸다. 원래 그런 행사와는 거리를 두어 온 나로서는 참석하기를 주저했지만 거듭되는 독촉을 받고 마지 못해 참석했다. 막상 그 자리에 가 보니 의외로 거기에 와 계신 연구자들과 학생들이 많아서 나는 깜짝 놀라고 당황했다. 참석한 사람들의 대다수는 과거 일본에 유학 했다가 지금은 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거나 대학원에서 연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 외에도 과거 만나뵌 일이 있는 교수님도 몇 분 와 계셨다. 감격스러웠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 참석한 교수들과 공동연구 한번 한 일이 없다. 그리고 유학생들이 일본에 있을 때 내가 직접 지도를 해서 학위를 따도록 한 일도 거의 없다. 내가 한 일이란 학교 제도상 교환 유학생을 받아들이는 사무적인 업무를 맡은 것과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연구 모임의 사무적인 연락처 역할을 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내가 다른 사람이 연모할 만한 인품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은 자타가 다 인정하는 사실이다. 참석하신 교수님이나 과거의 유학생 중에는 나하고 사소한 일로 심하게 싸우다시피 한 사람도 몇 명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출판기념회를 계기로 그렇게 모일 수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셈인가?

시기를 달리 해서 과거 일본에 유학한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인 그 자리는 이상한 열기를 띠고 있었다. 이십 년 가까이 해마다 파견된 유학생들이 한데 모인 연대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청춘 시절의 유학 생활에 아무리 괴로운 경험이 있었다고 해도 세월이 지나가면 청춘의 기억은 달콤한 추억으로 변해진다. 나는 그들의 청춘 시절 현장의 동반자였던 것이다. 당시 나는 수업 시간에도 학생들을 교수들과 같은 자격의 연구자로 대우하려고 했다. 그것은 나 자신이 학생 시절에 배운 것이었다. 교수는 절대로 학생을 심부름꾼으로 이용하면 안된다. 그것은 연구자가 지켜야 할 첫째 모랄이다. 한편 연구 모임도 내용이 그리 어마어마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수준이 낮은 발표라고 하더라도 참석한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를 교환하고 토론하는 과정을 통해서 성과가 어떤 식으로 나오는가 실제로 경험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대다수의 일본사람들은 대학교에 일자리를 얻은 후 이런 데서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발길을 끊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맡은 두 가지 일 즉 수업에서도 모임에서도, 누구나 솔직하게 자신의 연구 계획이나 중간 보고를 할 수 있도록 절대로 발표자나 토론자의 업적 혹은 착상을 뺏으면 안된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 당시의 유학생들이 모두 다 그런 원칙을 인식했는 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몰랐다고 해도 어딘가 색다른 분위기를 감지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청춘의 동반자로서 그들의 청춘의 경험이 앞으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것을 바라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지금 눈 앞에 있는 기념논문집은 아직까지 봉오리인 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기에 실린 논문의 수준이야 어쨌든, 거기에 담겨져 있는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내 30년의 연구생활 마지막에 처음으로 순수한 사람들의 후의와 따뜻함을 맞본 것이 더 할 나위 없는 행복으로 여겨진다. 이제 나는 자유로운 한 사람의 인간으로 새로운 세계에서 연구의 가능성을 찾아서 출발하려고 하고 있다. 앞으로 30년 힘이 다할 때까지 노력을 할 용기를 갖게 해 준 것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30년 후에 여러분과 다시 만나 각자의 열매를 서로 보일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여러분 감사합니다.